한국의 유수한 1천수백년 불교유적은 조선시대에 많이 파괴됐다.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배척한 건국이념 때문이기도 했지만 임진전란등 외침에 의한 수난이 더욱 컸다. 전국의 국보급 사암(寺庵)들이 이 시기 불태워졌거나 침탈을 당했다. 그런데 각 사암에 사용되었던 건축부재들도 민족의 수난을 말해 주듯 유랑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던 것 같다.

70년대 후반 영동 황간 향교(鄕校)를 답사한 적이 있다. 그런데 향교의 건축부재에서 고식(古式)의 사찰 부재가 다량 발견 되었다. 연화문이 아름답게 조각된 대좌가 주초석으로 이용되고 정연하게 다듬어진 장대석이 대성전의 계단으로 이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 건축부재들은 어디에서 옮겨져 왔을까. 필자는 향교 전교로 부터 전해 내려오는 얘기를 듣고 그 비밀을 쉽게 풀 수 있었다. 이 석재들은 황간 향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영동 한천팔경중의 하나인 심묘사(深妙寺) 터에서 옮겨진 것이었다.

심묘사는 보령 성주산문을 개창한 무염국사(無染國師)가 주처했던 신라 명찰로 왕실의 비호를 받은 대가람이었다. 헌강왕(憲康王)과 왕비는 무염국사의 강론을 사랑하여 그가 서라벌 가까이 있기를 희망했다. 보령 성주사는 왕도에서 너무 머나먼 길. 국사가 한번 왕경을 다녀오려면 많은 시간이 걸리고 힘이 들었다. 그래서 신라 왕실은 황간 월류봉 아래에 터를 잡아 가람을 짓고 스님을 정착하게 한다.

여지승람의 기록을 감안하면 이 절은 임진전란 때 소실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화려했던 건축물은 모두 소실되고 절터에는 주춧돌과 장대석등 산란했을 것이다. 인근 주민들은 향교를 보수 정비하면서 이곳의 부재를 가져다 이용했던 것이다.

단양 가곡면 덕천리에는 고려 때 유명한 사찰이 있었다. 바로 덕천사(德泉寺)라는 절이다. 고려 24대 왕 원종(元宗)의 아들 익장(益藏)이 주지가 되어 덕천사에 머물 정도로 왕실의 비호를 받았다. 이 절은 자복사(福資寺·국가에서 복을 빌던 절)로 지정되어 조선전기 까지 명찰의 지위를 누렸으나 임진전란시기 폐사되었다. 그런데 사찰의 많은 건축 부자재들이 지금도 민가의 주초석으로 사용되고 있다.

대원군은 부친 남연군의 묘를 쓸 당시 천하의 명당이라고 하는 충남 덕산 가야사를 허물었다는 얘기가 있다. 가야사는 본래 백제 때부터 향화가 이어져온 명찰이었으나 임진전란 당시 화를 입었던 곳이다. 대원군은 가야사지 뒤편 토산에 묘를 쓰기 위해 사찰에 있던 각종 석재들을 옮겨 썼다고 한다. 그런데 아들을 제왕에 올려놓았으나 독일 상인에 의해 부친의 묘소가 도굴되는 능욕 당했다.

충주 소태면 청룡사는 보각국사 탑비가 서있는 유명 가람이었다. 이 절도 임진전란 시기 화를 당했다. 그런데 조선시대 후기 모 재상의 묘소를 쓰면서 사찰의 석재들을 옮겨다 호석을 삼았다. 절터가 명당이어서 이곳에 묘를 쓰면 후손들이 크게 출세한다는 속설을 믿은 때문이라고 한다.

국보로 지정된 ‘용두사지철당간’이 자리 잡은 청주시 남문로 일대에서도 상가를 개축 할 당시 용두사에서 사용됐던 건축 부재들이 발견 된 적이 있다. 용두사는 당초 통일신라 서원경시기에 창건되어 고려후기까지는 성세를 누린 읍성안의 관찰(官刹)이다. 그러나 조선 개국 후 청주목 관아가 자리 잡으면서 훼손되었을 것으로 상정 된다. 지금도 많은 석재들이 민가에 운반되어 이용된 것이 종종 찾아진다.

일제 강점기 헐린 청주읍성 성돌도 하수구에 묻히거나 이곳저곳에 세워진 건축물의 부재로 유랑했다. 그런데 최근 건축학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청주읍성 돌들이 도유형문화재로 지정받은 ‘탑동 양관’건물의 주춧돌 등의 용도로 많이 사용된 것으로 밝혀졌다고 한다. 확인 된 돌 가운데는 무늬가 조각된 돌도 있고 공역(工役)에 관한 글씨가 조각된 것도 있다는 것이다.

청주읍성 돌로 기초를 삼은 양관도 아픈 근대사의 잔영이다. 임진전란 시기도 그랬지만 일제 침략기에도 얼마나 많은 우리 문화유산이 훼손되었나를 말없이 증언해 주고 있다.